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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낙동 2011. 5. 20. 15:57

  

 

 

마땅히 볼 책도 없어 예전에 읽었던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다시 꺼내었다.

 

머릿글부터 감이 오지 않아 한참 생각했다

아마 지금도 감이 잘 오지 않으니 예전에도 그냥 넘어 갔으리

 

그는 책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또 아름다웠다. 내가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그것들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자기 글을 빈곤한 한 줌의 언어라고 적었다 하더라도

그는 5월의 산과 함께 또 산을 이렇게 표현한다.

 

『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오직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만 말하여질 수 있다.

 

-- 중략 --

 

라인홀트메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m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 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산으로 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 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퇴계는 평생을 산이 가까운 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산 가까이 살기 위하여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임금에게 사직서를 보냈다.

퇴계는 안동의 청량산을 즐겨 찾았고 멀리 갈 때는 풍기의 소백산까지 다녔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산수의 의미를 가르쳤는데 한 번 산행에 며칠씩 걸렸다.

퇴계는 도피와 일탈로서의 산행을 나무랐다.

산속에서 ‘청학동’을 묻는 자들의 몽환을 꾸짖었다.

산에 가서 ‘안개와 노을을 마시고 햇빛을 먹으려는 자들’을 퇴계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산에 속아넘어가서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인간들을 퇴계는 가엾게 여겼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것이 산에 처하는 퇴계의 마음이다.

산이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산은 아름답다.

산에 관한 퇴계의 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퇴계의 산은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구현되어야 할 조화의 산이다.

 

우리는 메스너의 길을 따라서 산에 오를 수도 없고

한산자나 도가의 길을 따라서 산에 오를 수도 없다.

메스너를 따라가자니 외로움과 싸울 일이 두렵고,

한산자를 따라가자니 몽환의 열정이 모자라기도 하고, 우선 생활이 발목을 잡는다.

아마도 우리는 퇴계의 멀고 먼 뒤를 따라서 겨우 산에 오를 수 있을 터이다.

퇴계의 산행은,

돌아와서 산과 함께, 산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오기 위한 산행이고

인간의 마을을 새롭게 하기 위한 산행이다.

마음속으로 산을 품고 내려오려 해도 산은 좀처럼 따라오지 않는다.

휴일의 날이 저물고 사람들 틈에 섞여 산을 내려올 때,

성인은 벌써 산을 다 내려가서 마을에 계신다.

천하에 무릉도원은 없다.』

 

 

 

5월의 지리산 숲

 

5월의 지리산 숲은 온 천지의 엽록소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지르듯이 피어난다.

나무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피어나 숲을 이루고 숲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산을 이루어,

수많은 수종의 숲들이 들어찬 지리산은 초록의 모든 종족들을 다 끌어안고서 구름처럼 부풀어 있다.

 

5월의 지리산 숲은 소나무, 차나무, 편백 같은 상록수의 숲과 새잎이 돋아난 활엽수의 숲으로 대별된다.

상록수숲은 수종에 따른 색의 차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소나무도 새 솔잎이 돋아나지만, 소나무의 새잎은 날때부터 이미 강건한 초록색이어서,

소나무숲은 봄에도 연두의 애잔함이 없다.

전나무의 새잎은 연녹색이지만, 그 기간은 잠깐이고 전나무는 검푸른 녹색으로 봄을 맞는다.

화개 골짜기의 차나무숲이나 선운산 뒷산의 동백나무숲이나 화순군 동복면의 편백나무숲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흰 눈에 덮인 겨울 산에서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우뚝하지만, 온 산이 화사한 활엽수들의 신록으로 피어날 때,

연두의 바닷속에서 섬처럼 들어앉은 상록수의 숲은 더욱 우뚝하다.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자작나무 잎들은 겨울이 거의 다 가까이 왔을 때 땅에 떨어지는데,

그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그 이파리들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바람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그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사람이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그 잎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사는 숲처럼 보인다.

잎은 다 떨군 겨울에 자작나무숲은 흰 기둥만으로 빛난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의 기쁨과 평화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들일 만하다.

실제로 북방 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작나무숲에 깃들이는 것으로 믿고 있다.

자작나무숲으로 간 혼백들은 복도 많다.

 

은사시나무의 신록은 수줍고 또 더디다.

다른 모든 숲들이 연두에서 두터워져갈 때, 은사시나무숲은 겨우 깨어난다.

갓 깨어난 은사시나무숲은 희뿌연 연두의 그림자와 같다.

멀리서 보면 은사시나무숲의 신록은 봄의 산야에 낀 안개처럼 보인다.

이 숲에서는 젖을 토하는 어린 아기의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나무가 싹을 내밀기 전에, 나무의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생명의 비밀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은사시나무는 높고 밑둥은 굵지 않아서 은사시나무숲은 숲 전체가 바람에 포개지면서 흔들린다.

은사시나무숲의 이파리들은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일제히 뒤집히면서 나부껴서,

은사시나무숲은 풍향에 따라서 색이 바뀐다.

 

오리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숲 들의 신록은 거칠게 싱싱하다.

그 숲의 이파리들은 아름다움의 정교한 치장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여름의 검푸른 초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 숲의 이파리들은 억센 사내들의 힘줄같은 잎맥을 가졌다.

이 숲은 봄의 현란함이 아니라 여름의 무성함 속에서 완성되는, 넓고 힘센 활엽수들의 숲이다.

이 숲에서는 짙은 비린내가 나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폭포 소리가 난다.

 

섬진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자전거를 달릴 때,

신록의 산들과 여러 빛깔의 숲들이 강물 위에 꺼꾸로 비쳤다.

성불하지 못한 산속의 젊은 승려는 결국 갈 수 없는 숲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숲의 아름다움은 아직은 너무 멀다.

모래톱 물가에서 혼자 사는 왜가리 한 마리가 물음표(?) 모양으로 서서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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