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나를 남기는 것에, 종교는 나를 버리는 것에 헌신하는 것이에요”
집에서
잘 싼 짐을 풀어야 했다. 무게를 다시 조정해야 했다.
짐을 풀어서 하나씩 방바닥에 늘어놓아보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짐이 무거워진 이유는 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는 생각에 있었다.
순례중에
무엇을 버릴까 . . . . 마치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만큼 진지해진다.
고심 끝에 빈 비닐봉지 하나, 누빈 옷가방, 약봉지 하나, 이쑤시개 두 개를 버리기로 한다.
아까운 것보다 필요한 것을 버리기가 더 어렵다. . . .
그런데 라레도를 지났을 무렵이었다. 집에서부터 길을 떠나 걷기까지 줄곧 ‘짐을 벗는다’‘가볍게 한다’는 것에만
골몰해왔으나, ‘짐을 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짐을 가볍게 하면 물론 걷기는 편하다. 최소한 나는 편하다.
하지만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던가?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람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
무거운 짐을 질수 있는 영육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6시 30분 떠날 준비를 한다. 무엇을 버리고 떠날지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어제저녁 먹다 남은 빵과 요구루트, 치즈를 꺼내어 선 채로 조금 먹고, 남은 것과 생수 반병을 비닐봉지에 싼다.
들어보니 제법 무겁다. 오늘은 무거운 짐이라도 진다. 더 무거운 짐이라도 ‘지고간다‘로 모드 전환하는 첫째 날이다. . . .
순례중 복통.
카페의 의자에 지친 몸을 내려놓은 순간 통증이 배를 뒤틀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노란 진땀이 흘러내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들어가기를 되풀이했다. 죽을 맛이었다.
고열과 복통으로 신음하는 중에도, 사탄이 내 길을 방해하기 위해 스쿠루 같은 손으로 배를 휘젖는 것처럼 느껴졌다. . .
......중략.....
죽음은
오지 않은 내일이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오늘 이때의 속살 속에 있다.
지팡이
길을 걸어보니 지팡이는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장비였다.
잠시 쉬었다가 일어날 때 배낭 무게 때문에 중심이 뒤로 쏠리는 것을 지팡이에다 무게를 분산시키면 일어나기가
훨씬 수월했고, 비가 올 때, 오름길 내림길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고,
길이 물에 잠겼을 때 지팡이를 꽂아 물이 어느 정도 차 있는지 가늠해 볼 때도 유용했다.
그 밖에도 돌멩이들이 꽉 차 있는 길에 낙엽이 쌓여있고, 거기다 밤송이들이 가득 떨어져 있고,
또 거기다 알밤들이 삐져나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길은 삐끗했다 하면 발목을 접질리기 십상인데,
그럴때도 지팡이를 정찰병으로 내세워 길을 탐색하며 훨씬 안전했다.
그런데 코미야스에서 일이 생겼다.
몇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지팡이가 툭 부러졌다.
난감했다. 세 다리 중 한 다리를 잃었으니, 부러진 한 다리로 말하자면 강력한 특수소재로 만들어져
히말라야 같은 험준한 산을 타는 산악인들이 쓰는 장비였다.
마음이 내내 지팡이에 묶여 있었다. 아무래도 지팡이를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꿈속에서 생명수병을 가슴에 꼭 품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늘 궁금했던 성경말씀을 떠올려보았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날 새벽녘 꿈을 꿨다. 흐릿한 어둠 뒤편에서 누군가 하얗고 미끈한 지팡이 하나를 내게 하사품으로 내려주셨다.
감격스러워하면 두 손으로 받았다. 꿈을 깨자마자 꿈의 의미가 이내 깨달아졌다.
이제 너는 지팡이를 밖에서 찾지 말라. 네 안에 이미 들어 있다.
화살표
산티아고는 내게 순례의 종착역이 아니다.
산티아고는 내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문이자 또 다른 화살표이다.
그 화살표가 성경 속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그랬듯,
‘이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자리로 나를 이끈다 해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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